영화

Spider-Man 3

차오롱 2007. 5. 5. 02:34

스파이더 맨 1편과 2편을 보지 못했다. 실은 쫄쫄이 바지 입은 남자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영화에 별 흥미가 없었다. 웬지 결국엔 악당을 물리치고 주인공이 승리하게 될 빤한 스토리라는 편견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으론 전편들에 비해 스토리가 많이 약해졌다고들 이야기 하던데 덕분에 기대하고 비교할만한 입장이 아니다보니 영화에 대한 몰입이 더 쉬웠다. 꽤 긴 시간 디지털 상영관의 훌륭한 그래픽에 넋을 잃다보니 어느덧 영화 속에 푸욱 빠져버렸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가끔은 입술도 질끈 깨물어주고. 게다가 주인공과 악당의 경계를 넘나드는 캐릭터들의 갈등, 변화무쌍한 변신과 화해의 모습들은 왠만한 성장통 영화를 능가하는 감동이다. 3억 달러나 들여 만든 영화라 그런가 영화 속 이모저모 돈 들이고 공들인 표가 팍팍 나는 것 또한 감동적이고 부러운 일이다. 3억 달러라니. 돈줄이 말라버린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일년 전체 영화 제작비용을 합쳐도 3억 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영웅 하나가 세상을 바꾸듯 영화 하나가 작은 나라의 영화 시장 판도를 바꾸는 것은 식은 죽 먹기도 안될 일이다. 엠제이를 구하기 위해 짠하고 등장한 스파이더맨이 2초 가량 성조기와 함께 클로즈업. 그 아래에서 스파이더맨을 연호하는 미국 시민들이 부럽기도 하구나. 니들은 좋겠다. 스파이더맨과 함께라서.

세상의 중심이 '나'인 인생이란 참 얄궂고도 얄팍한 속성이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 수 밖에 없다. 집회, 시위라는 단어랑 무관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친구의 머리에 경찰이 던진 화염병이 날아와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맞닥들이게 되면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으며 구국 투사가 되기도 한다. 쌀개방이 뭔지 몰라도 데모 행렬에 동참하여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 쓰러져 실려나간 것은 친구이지만 그것이 나 자신일 수도 있었다는 자각이며 두려움이다. 나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친구도 원수가 되며, 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선 기꺼이 강도가 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살인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받을 수 없다 배웠지만 어떤 다른 행동도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여겨질때가 왜 없겠나. 얄궂고 얄팍한 인생에서 '절대' 라는 말은 함부로 쓰지 말아야하는 단어다. 악의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확신하더라도 나의 선택이 늘 바른 길일 수는 없다. 때론 의지보다는 운에 지배당하는 가엾은 운명들. 어렵겠지만 이해하고 용서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부메랑 같은 인생사,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렷다.  

TTD)샘 레이미의 영화들 다시 챙겨보기 - The Evil Dead, The Messengers, The Grudge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