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 보자 공수표만 날리기를 몇 해. 드디어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온라인에서 알게된 이를 오프에서 만나는 벙개가 처음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누군가를 새롭게 만난다는 건 떨리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첫 만남에서 자그마치 네 시간을 쉴새없이 떠들었는데, 만나는 사람만 질리도록 만나는 협소한 대인 생활의 경력이 너무 길어서인지 대화의 수위 조절이란게 쉽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시작한 대화가 시와 소설을 살짝 넘어 남자(의 육체)는 이기적이다로 매듭짓는 대장정의 수다였다. 심야 지하철을 타고오며 그녀가 선물로 준 책을 넘기며 그림만 쓱쓱 구경한다. 문득 요즈음 나는 진정 소통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인게로구나 하는 부끄러운 감정이 살며시 고개를 들더니만 갑자기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건포도 칵테일 맥주의 위력이라기엔 다소 강력한 열기였다. 언제부턴가 표현이라는 것은 부끄러움과 즉각 연결된다. 살면서 그닥 큰 죄를 졌던 일... 기억에는 없는데 말이지. 그녀에게 지난 주에 사서 읽었던 걸 잊고 다시 같은 걸 사서 읽으며 의아해했던 영화 잡지를 전해주면서 말했다. 혹시 안보셨음 영화 미 앤 유 앤 에브리원 보세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네기엔 치곤 다소 생뚱맞았으나 처음 만나 대화를 풀어가기는 차암 어색하고 어렵단 말이지.
미 앤 유 앤 에브리원. 영화를 보는 동안의 감정이 정체불명의 슬픔에 가까웠다면 엔드 크레딧 직후의 감정은 극도의 조증. 영화를 보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몇 년 전 혼자 강남역 극장에서 봄날이 간다를 보고 나온 이후 참으로 간만에 느끼는 것인데, 여튼 영화가 그만큼 희안했다는 거다. 어릴적 발표만 하려고 일어서면 얼굴이 빨개지는 내게 선생님은 자꾸 발표를 시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징크스가 사라졌다. 어려운게 있음 자꾸 해봐야 한다는 것. 이 영화가 일종의 자극이었다고나 할까. 언제 또 변덕 모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당분간 사람들을 열심히 만나야겠다. 그러니 데이트 신청하실 분들은 서둘러 번호표를 받으시라고들. :-)
2006.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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