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bong's review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icon 분류 전체보기 에 해당하는 글45 개
2007.10.14   원스(ONCE)
2007.07.21   좋지 아니한가
2007.07.13   준벅(Junebug, 2005) 3
2007.06.29   두번째 사랑 (Never Forever) 1
2007.06.17   WOZZECK
2007.05.30   밀양
2007.05.18   설렁설렁 몰아서 1
2007.05.05   Spider-Man 3
2007.04.21   해변의 여인
2007.04.12   Breakfast on PLUTO


icon 원스(ONCE)
영화 | 2007. 10. 14. 02:39

두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엮은 옴니버스 뮤직비디오. 그렇다고 예쁜 영화라 표현 하기엔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뭐라 운을 떼기가 참 어려운 영화다. 대단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80분 내내 스크린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매력적이지만은 않기에 인간적인 주인공들도 그렇고 결론도 참 맘에 든다. 다만 영화를 보는 내내 기억의 잔상들이 저 밑바닥부터 울렁거리며 멀미 기운을 뿜어내는 판국에 영화 프레임도 흔들흔들 수평이 안맞기도 일쑤. 어지럽다. 감정의 표현은 서툴고 오해까지 겹치는 소통의 불가 상황들이 어느 누군가의 특별한 아니지 않은가. 미숙함은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 인간에게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시 누군가를 알아가야 한다는 것은 슬픔이고 고통일 수 밖에. 나는 당신을 몰라요. 그래서 당신을 더 알고 싶어요. 으아아아아.

영화 속 노래들을 듣는데 조덕배의 노래가 자꾸 오버랩 된다.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꺼야♬ 훗. 아마도 슬픈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는 없을 거란데 백원을 걸겠다. 사랑하고 또 이별을 해야할테니. 혹여 사랑하지 않아 이별할 필요가 없다면 아마도 더 구슬픈 노래를 불러야 할테니. 아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가 자꾸 부르고 싶어진다.

아직 ONCE를 보지 않았다면 나의 관람 성공기에 힘입어 속 깊은 이성 친구와 함께 보는 걸 특별히 추천한다. 주말 늦은 밤 이 영화를 기꺼이 함께 봐 준 당신, 당신은 언제나 좋은 친구야. 염치 없지만 OST도 부탁해. ;-)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좋지 아니한가
영화 | 2007. 7. 21. 00:57

금요 이벤트. 업무시간 중 간 크게 영화 관람. 좋지 아니한가. 소속사 배우들이 여럿 나오는 영화라 개봉시 봐줘야 하는게 예의겠으나 실상은 정 반대의 현실. 딴따라의 길로 접어든 이후 왠만해선 국내 개봉작을 극장에서 볼 일이 없다. 실은 인생에 있어 영화란 존재가 전보다 더 멀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여간 어찌어찌 우연하게 보게 된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너무 좋았다. 미국의 미스 리틀 선샤인과도 살짝 닮은 이 영화, 어찌나 신선하던지. 원조 교제 하는 여자 친구에게 앞으로 다신 그러지 말라며 부모님께 거짓말 하고 받은 돈을 찔러주고 달려 나오는 아들. 그런 아들에 절대 뒤지지 않는 늠름한 딸. 뭔가 나사가 두어개는 빠짐직한 헐랭이 이모. 원조 교제 의혹에 시달리는 교사 아부지. 아아 그리고 뭐라 해줄 말이 없는 어무니 감동의 우리 오마니. 아참 그리고 집 나갔다 돌아온 누렁이까지. 해가 저물면 옆집도 뒷집도 아닌 그들의 집에 들어오고, 딱히 서로들 사랑한다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한 집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잠든다. 그들은 가족이다. 좋지 아니한가.

가족이라고 해봐야 엄마와 동생 단촐하게 두 식구가 전부이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다시 들어온 것이 육개월 남짓. 집에 온지 몇일 지나지 않아 화장실 입구 조명 스위치 옆쪽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절전" 필체로 보아하니 엄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쳤는데 몇일 뒤 포스트잇에 추가 문구가 붙었다. "소봉아~ 절전 하자!♥" 절전이라는 글자 전후로 동생이 추가로 글자를 넣은 것. 엄니의 절전 메모는 바로 내가 주인공이었던 거다.  혼자 살면서 항상 불을 훤하게 키고 지내다보니 이젠 어딜 가든 왔다간 흔적을 이런 식으로 남기는게 습관이 된 것을 두 모녀가 그냥 넘길 수 없었던 모냥. 아직도 나는 샤워를 하고, 볼일을 보고 깜빡하여 화장실 불을 켜두고 나온다. 두 모녀는 내가 켜둔 불을 번갈아가며 참 열심히도 꺼준다. 물론 잔소리도 잊지 않는다. 제발 불 좀 끄라고. 그럼 나 역시 뒤지지 않고 꼭 한 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얼마면 되는데? 자꾸 구박하면 나 다시 집 나갈꺼야! 우리도 가족이다. 좋지 아니한가.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준벅(Junebug, 2005)
영화 | 2007. 7. 13. 00:49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남자 친구의 가족들과 처음 식사를 하고 돌아온 날의 느낌이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자리란 자고로 불편하고 어색하기 마련인데 거기에 더해 더 크게 자리하는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유원지 가든에서 갈비를 구워먹는데 헤필 또 그때가 치과 치료를 받던 중이라 그 좋아하는 고기를 맘껏 씹어먹을 수가 없었다. 순간 왠지 모를 서러움이 밀려왔다. 서러움의 정체가 뜨거운 고기 때문인지 성치 않은 이 때문인지 아니면 마냥 어색하기만한 그의 가족들 때문인지 영문도 모른채. 훗날 그 이야길 들은 유부녀 동생이 까르륵 웃으며 뒤로 넘어간다. 아마도 그건 식구가 아니기 때문일거라며 결혼을 하더라도 식구가 되는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거라고 훈수를 둔다. 큰일이다. 먹을 것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이 참으로 걱정스럽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의 스틸컷을 골라봤다. 주인공 커플이 남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고향. 그녀의 눈에 가족들 속에서의 남자는 면면이 다른 사람이다. 저렇게 멋지게 찬송가를 부르는 줄 아는 남자였다니. 그녀는 감탄한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에게 남자의 가족들은 배타적이고 무뚝뚝하며 요모조모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의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그녀는 너무 예쁘고 똑똑하며 나이가 많다. 그들은 너무 다르다. 새롭게 맞닥들이는 나와 다른 것에 무조건의 호의를 베풀 수 있다는 건 축복 받은 일이다. 대개 그러한 경우는 행복한 푼수 혹은 범인의 삶을 뛰어넘은 비범한 범주의 사람들 아니겠나. 영화는 억지스럽지 않다. 그래서 평범한 캐릭터 하나 하나가 모두 정이간다. 모두가 미워할 수가 없으며 모두가 나같다.     

식구는 가족인가. 가족이 식구인가. 이것은 분명 우리네 인생이 녹녹치 않음에 일조하는 어렵고도 민감한 이슈일게다. 아마도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문제일테지만 누구도 쉽게 풀 수 없는 숙제겠거니. 사실 이 영화는 빤히 예상했던 가족 영화가 아니었다. 미우나 고우나 결국에 남는건 내 마누라 내 남편 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려는 부부 영화가 아닐까 싶더라. 아참, 영화 속 Yo La Tengo 음악들이 참 유쾌 상쾌 정겨웁다. :D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두번째 사랑 (Never Forever)
영화 | 2007. 6. 29. 00:4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아직 인생 경험이 미천한지라 플라토닉 러브가 무언지 모르겠다. 실은 그닥 궁금하지도 않은 듯 하다. 내가 느끼는 사랑이란 참으로 개인적이고 소박한 형태의 에로스. 그의 손이 손목에 처음 닿았을 때 온 몸을 감전시키던 백만 볼트의 에너지, 세상을 새하얗게 지워준 몽글 달콤한 키스, 그리고 당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체위를 각자 하나씩 상상해보도록 하자. :-) 내 마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은 거짓말을 못한다. 그래서 나는 섹스 파트너란 표현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남편과 섹스 파트너가 있어요 보다는 남편도 있고 애인도 있는 것이 낫지 않겠나. 아 이건 적절한 비유가 아닌가. :D

주인공 소피는 사랑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다른 남자와의 섹스를 시작한다. 처음 그녀는 남자와의 섹스 후 온 몸을 구석구석 씻어내더니 나중엔 남자의 체취를 몸에 남기기 위해 씻는 것을 소홀히 하게된다. 처음 그들의 섹스가 시작되었을 때는 소피 스스로 옷을 벗어 가지런하게 개어 비닐팩에 넣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여자는 남자의 도움으로 지퍼를 내리고 결국엔 온 몸을 남자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남자와 사랑에 빠졌음을 깨닫게 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대단하고 세상 하나 밖에 없을 나의 사랑과 달리 남들의 사랑은 진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겠나. 흐으. 재밌는 건 영화를 보기 전 이미 엔딩에 대한 정 반대의 두 가지 해석에 대한 논쟁들을 접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한국식 타이틀 '두번째 사랑'과 영어 타이틀 'Never Forever'의 뉘앙스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그냥 한국식으로 받아들였다. 두번째 사랑이 시작되었노라고. 중요한 건 결국엔 사랑을 통해 그녀가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써놓고 보니 이거 대단한 스포일러. (아엠쏘리...)  

이 영화는 여자들의 영화다. 감독도 여성, 주인공도 여성, 아마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 취향 또한 여성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컥하고 위태로웠다. 빼어난 영화 음악과 영상들도 이 영화를 보는 쏠쏠한 묘미. 하정우를 보기 위해 표를 끊었지만 결국엔 베라 파미가 라는 파란 눈의 여배우에게 푹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영화. 그녀의 투명한 피부와 사랑스러운 금발 그리고 갈아입는 족족 감탄스러웠던 예쁜 옷들...제법 오래도록 그녀의 잔상이 남을 것 같다.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WOZZECK
공연 | 2007. 6. 17. 13:40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첵은 이발관 출신의 병사. 그는 가난하다. 보첵은 세상의 유일한 구원 마리를 만나고 아이를 낳았다. 그는 가난하다. 그리하여 보첵은 돈을 벌기 위하여 박사의 생체 실험 마루타에 자진해 들어가고 콩과 양고기만 먹으며 오줌을 싸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가난하다. 보첵의 여자 어여쁜 마리는 악대장과 정을 통하게되고 이 사실을 알게된 보첵은 그녀를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은 호수에 빠져 죽는다. 그는 가난하다. 보첵과 마리의 아이가 홀로 남겨졌다. 아마 그도 가난할 것이다.

우아하고 낭만적인 오페라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보체크는 매우 끔찍한 관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개선될 기미라곤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암흑같은 삶의 연속. 인생의 희망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위선일 수 있는 현실. 가난은 불편한 것일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가난이 선택이 아닌 숙명일 경우 가난은 불편이 아니라 생존의 운명을 좌우하는 무시무시한 惡의 시작이 된다. 애미 애비가 모두 죽고 홀로 남은 아이의 뒷모습,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잔인함에 가깝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음악과 무대, 관객을 홀리던 뇌쇄적인 마리의 새빨간 드레스 그리고 박수 갈채. 화려한 무대 인사 뒤로 상처와 비극은 봉인된다. 이제 아름다운 삶은 다시 각자의 몫이다.


@보체크(오승용),마리(김선정)

- 2007.6.16 LG아트센터 (special thaks to cucu)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밀양
영화 | 2007. 5. 30. 17:10

밀양은 대도시 부산에 인접한 소도시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완벽한 무관심도, 옆집 숱가락이 몇 개인지 알만한 씨족 부락 사회의 골때리는 친밀함도 아닌 정도의 관심. 어정쩡한 거리의 관계에서 싹트는 욕망과 얕은 호기심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정도의 공간에서 인간의 속물적인 속성은 극대화된다. 스스로를 적당히 드러내며 과시할 줄 알아야 하며 대책없는 상대의 관심과 호기심어린 눈길을 제압하고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개인은 저마다 비밀스런 방식으로 살기 마련이다. 내 마음 속에 지옥이 있다. 내 마음 속에 천국이 있다. 당신이 보고 있건 아니건 그건 중요치 않아. 당신이 보이건 보이지 않건 그 또한 중요치 않아. 세상에 숨쉬고 있는 누구에게나 비밀스런 태양은 빛난다. 밀양은 Secret Sunshine이다.

이번 영화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그건 바로 송강호다. 밀양 사투리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영화 전반을 끌고 가는 카센타 김사장(송강호)의 아슬아슬하고 절묘한 힘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테고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재미는 확실히 반감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밀양 사투리는 커녕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있을리 만무한 깐의 관객들이나 외신 기자들이 과연 이 영화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 하는 안타까움. 결과적으로 전도연은 훌륭한 배우이기도 하지만 매우 운 좋은 배우가 되었다. 

오아시스 이후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는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힘이 커졌다고들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혼을 잠식하던 불안과 아슬아슬한 기운의 정체가 불편이라면 난 앞으로도 기꺼이 그의 불편한 힘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며 느끼는 해방감으로 난 잠시간 매우 행복했다. 그 순간 내 손에 전화기가 들려있었다면 그에게 전화해서 따뜻한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다. 아마도 사랑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설렁설렁 몰아서
영화 | 2007. 5. 18. 14:12

타인의 삶 (건대 롯데 씨네마) 

 

영화의 마무리를 제대로 완성해주는 자막 한 줄. HGW XX/7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를 살게 했고 그는 그들을 살게 했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문득 수많은 타인과 결합한 나의 삶이란 생각보다는 아름다운 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와 나의 아름다운 인생이라니. -랄라... 내 마음에 도청장치를 달겠어요. 그대 부디 나를 살게 해주세요.

 

 

 

, 김기덕 (종로 스폰지 하우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후속편. 이제 내게 김감독은 '이해하고픈' 사람이라기 보다는 곁에 두고 '관찰하고픈'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리고 확실히 그런 태도의 변화는 그의 영화에 대한 나만의 가치를 견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어쩌면 그 또한 영화를 통해 철저히 세상을 관조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쉰다. 나는 살아있다. 사랑보다는 순수와 희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라야 더 많은 이들이 함께 구원을 나눌 수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강변 CGV)

 

안에 있어도 지옥, 밖에 있어도 지옥이라면 차라리 바깥을 선택하겠어요 라며 달려나가는 마츠코. 그런 여인네가 종국엔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라고 무한 반복. 사는건 혐오스러운 선택의 연속이다. 혐오스러운건 마츠코가 아니라 삶 자체가 그러했을 뿐. 감히 2007년 최고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누가 한 번 더 보자고 한다면 선뜻 다시 볼 자신이 없다.  

 

 

 

천하장사 마돈나, 해영 이해준 (원더랜드)

 

애가 애답지 못하고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것이 어디 그 개인만의 문제일까. 나는 뭐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거야 라고 절규하는 동구는 애도 어른도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오동구는 이름 값을 해내며 천하장사가 되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동구는 마돈나가 될 것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꼽은 이 영화 최고의 백미는 학교 옥상 위에서 씨름부 행님과 동구가 노래 '애송이'를 완벽한 호흡으로 소화해내는 롱테이크 투샷. 그리고 보는 내내 오마이 가드를 부르짖게 만드는 씨름부 삼총사의 끝내주는 개인기들. 좋은 영화 만들어 미약한 박동의 가슴을 뛰게 해준 이형제 감독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작은 바램이 있다면 다음 영화에는 기왕지사 힘을 좀 더 팍팍 빼주시어 작정하고 허리띠 끌르고 웃게하소서. 떼굴떼굴 구르면서도 웃는게 괜시리 미안한 부담감이란...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Spider-Man 3
영화 | 2007. 5. 5. 02:34

스파이더 맨 1편과 2편을 보지 못했다. 실은 쫄쫄이 바지 입은 남자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영화에 별 흥미가 없었다. 웬지 결국엔 악당을 물리치고 주인공이 승리하게 될 빤한 스토리라는 편견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으론 전편들에 비해 스토리가 많이 약해졌다고들 이야기 하던데 덕분에 기대하고 비교할만한 입장이 아니다보니 영화에 대한 몰입이 더 쉬웠다. 꽤 긴 시간 디지털 상영관의 훌륭한 그래픽에 넋을 잃다보니 어느덧 영화 속에 푸욱 빠져버렸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가끔은 입술도 질끈 깨물어주고. 게다가 주인공과 악당의 경계를 넘나드는 캐릭터들의 갈등, 변화무쌍한 변신과 화해의 모습들은 왠만한 성장통 영화를 능가하는 감동이다. 3억 달러나 들여 만든 영화라 그런가 영화 속 이모저모 돈 들이고 공들인 표가 팍팍 나는 것 또한 감동적이고 부러운 일이다. 3억 달러라니. 돈줄이 말라버린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일년 전체 영화 제작비용을 합쳐도 3억 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영웅 하나가 세상을 바꾸듯 영화 하나가 작은 나라의 영화 시장 판도를 바꾸는 것은 식은 죽 먹기도 안될 일이다. 엠제이를 구하기 위해 짠하고 등장한 스파이더맨이 2초 가량 성조기와 함께 클로즈업. 그 아래에서 스파이더맨을 연호하는 미국 시민들이 부럽기도 하구나. 니들은 좋겠다. 스파이더맨과 함께라서.

세상의 중심이 '나'인 인생이란 참 얄궂고도 얄팍한 속성이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 수 밖에 없다. 집회, 시위라는 단어랑 무관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친구의 머리에 경찰이 던진 화염병이 날아와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맞닥들이게 되면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으며 구국 투사가 되기도 한다. 쌀개방이 뭔지 몰라도 데모 행렬에 동참하여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 쓰러져 실려나간 것은 친구이지만 그것이 나 자신일 수도 있었다는 자각이며 두려움이다. 나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친구도 원수가 되며, 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선 기꺼이 강도가 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살인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받을 수 없다 배웠지만 어떤 다른 행동도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여겨질때가 왜 없겠나. 얄궂고 얄팍한 인생에서 '절대' 라는 말은 함부로 쓰지 말아야하는 단어다. 악의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확신하더라도 나의 선택이 늘 바른 길일 수는 없다. 때론 의지보다는 운에 지배당하는 가엾은 운명들. 어렵겠지만 이해하고 용서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부메랑 같은 인생사,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렷다.  

TTD)샘 레이미의 영화들 다시 챙겨보기 - The Evil Dead, The Messengers, The Grudge 2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해변의 여인
영화 | 2007. 4. 21. 18:4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년 전 봄인가 가을의 일이다.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원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며 잠적할테니 그리 알고 있으란다. 알리고 가는게 무슨 잠적이고 거기가 어딘지 알리기나 해봐라. 혹여 행불이라도 되면 마지막 통화하는 이가 내가 되어 알고 있어야지 않겠냐 했더니 재수없는 소리 말라며 전화를 휙 끊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 소봉아 거기 어떻게 가지? 거기가 어디야. 거기 있잖아. 홍감독 해변의 여인에 나오는 서해안 바닷가. 신머시기인데. 몰라? 몰라. 나 아직 그 영화 안봤는데. 그래? 니는 그 영화도 안보고 머했냐. 언능 챙겨 봐라. 꼭 봐줘야 한다. 그래 알겠어. 만약 당신이 서울로 안돌아오면 그때 영화보고 그리로 찾아갈게. 응 안녕. 물론 그녀는 돌아왔다. 그것도 하룬가 이틀만에. 그리하여 나는 해변의 여인을 볼 수 있는 기회를  한참 놓쳐버렸다. 그리고 해가 지나갔다. 황사가 심한 주말 문득 해변의 여인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 홍감독 영화는 묵혀서 보게되는것 같다. 단 한번도 극장에 가서 돈주고 본 적이 없다. 다음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겠다. 이젠 그래도 될 것 같다.

주변 사람들 중에 더러 홍감독의 영화를 불편해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남자들에겐 그의 영화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크리티칼'한 부분을 건드려 거세시키는 힘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신기하게도 해변의 여인에 중래의 대사 속에 자주 등장하는 '크리티칼'이란 말이 자꾸 귀에 밟힌다. 어쩌면 정말루 감독의 의도하에 크리티칼한 부분을 건드려 거세하고 해탈하고픈 것일런지도. 그러나 여전히 홍감독의 영화는 재밌다. 차마 말로 풀어놓기 껄쩍지근한 트라우마를 어떤 식으로든 툭 까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힘, 그리고 그것은 재미로 다가온다. 결국 나의 일상도 다르지 않거든.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치고 상처주고 결국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것. 생판 모르는 남 보다는 가까운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길 확률이 크다는 것. 누군가에게 굳이 인생에 가장 피하고픈 미덕이 집착이라 말한다는 건 결국 스스로가 거추장스런 집착을 잡고 있거나 혹은 누군가의 집착으로 호되게 고생 해보았거나. 그리고 남자가 다 괜찮으니 과거를 고백하라는 건 개뻥이라는거.(흣) 결국 한 인간의 인생이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해봤자 드러나는건 빤하고 그래서 재밌다. 고현정과 문숙, 김상우와 종래의 캐릭터가 어찌나 딱이든지 덕분에 더 낄낄거렸네. 올 봄이 가기 전에 신두리에 한 번 다녀와야지. 그리고 당연히 오늘 저녁엔 회에 소주를 먹어줄 생각이다.

arrow 트랙백 | 댓글



icon Breakfast on PLUTO
영화 | 2007. 4. 12. 02:0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생의 시작
누구도 스스로 인생의 시작을 선택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공평하다. 재밌는 것은 수많은 인류의 랜덤 조합으로 무한대 예측불허의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처녀가 애를 낳기도 하고, 심지어 신부도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와이 낫.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공평한 시작도 잠시, 예측불허 전방위 불공평이 개입하며 이내 인생은 억울해진다. 아마도 그 시작은 빵굽는 화덕에서 나와 탯줄을 끊는 순간부터가 아닐런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남자에게 사탕과 장미를 받으며 인간은 여자가 된다. 그리고 때론 사랑은 살아야 하는 전부가 되기도 한다. 그런 사랑이 하나 둘 모여 별은 조금씩 더 밝아진다. 사랑은 참 근사한 일이다.


arrow 트랙백 | 댓글



[PREV] [1][2][3][4][5] [NEXT]
관리자  |   글쓰기
BLOG main image
Out of sight out of mind.
분류 전체보기 (45)
영화 (43)
공연 (2)
Total :
Today :
Yesterday :
rss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관리자
차오롱's Blog is powered by Daum / Designed by plyfly.net